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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시간의 꽃, 자주닭개비를 위하여

그대는 모른다
새벽 안개가 물러간 자리에서
가장 먼저 피어나는 고요의 순명을
어떤 위대한 경전보다 조용히 읊는다는 것을

 

자주빛,
그 짙고도 침묵하는 색채는
삶과 죽음 사이,
언어 이전의 진리를 암시하는 기호 같아
마치 붓다의 눈매 한 자락이
풀섶에 내려앉은 듯

 

풀잎처럼 겸허한 줄기 끝에
하루를 다 피워 올리고,
이내 지는 꽃—
무상(無常)의 진리를 그보다 더 분명히
증명할 수 있는 존재가 또 있을까

 

그대는 늘 거기 있었으나
누구도 보려 하지 않았던 것
그 작음 안에 세계는 다 있었고
그 짧음 안에 영원은 머물렀다

 

철학은 스스로를 부풀리고
시는 스스로를 태운다지만
자주닭개비는 묻지 않는다
어찌하여 피었는가, 어디로 질 것인가를

 

단지
무엇이든 다 사라진 뒤에도
한 줄기 기억처럼 남아
그대 내면의 정적 속에서
문득 피어나길 바랄 뿐

 

 

순명(順命): 운명을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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