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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을 위한 행진곡

펌글2010. 5. 13. 22:31

임을 위한 행진곡

최도은의 노래 이야기(6)

1982년 2월20일 정오 광주 망월동 묘역에선 광주민중항쟁 시민군 대변인인 故 윤상원과 故 박기순의 영혼결혼식이 친지들에 의해 진행되었습니다. 두 분의 영혼결혼식을 배경으로 노래굿 <넋풀이>(일명 ‘빛의 결혼식’)가 만들어졌는데, <넋풀이>에 실린 마지막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김종률씨가 작곡을 하고 소설가 황석영씨가 백기완 선생의 시에서 따온 구절을 각색해 만든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입니다.

노랫말은 백기완 선생의 시 '묏 비나리'에서 따온 것인데, 선생이 1979년 겨울 보안사에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하는 통곡의 현장에서 저항의 울부짖음으로 “산자여 따르라”라는 시를 기록했다 합니다. 1980년 12월 선생이 병보석으로 석방된 후 1982년 시집 <젊은 날>이 세상에 발표됩니다만, 당시 군부독재의 폭정이 횡행하는 상황에서 ‘묏 비나리’는 시집에 싣지 못하고 복사본으로만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합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작곡은 당시 전남대 경영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김종률씨가 맡았습니다. 김종률씨는 1979년 제3회 MBC 대학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란 노래로 은상을 탄 재주꾼으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만든 작곡자임이 밝혀진 후 수차례 수사기관에 끌려 다니며 고초를 겪었다 합니다. 지금은 ‘SONY BMG 뮤직엔터테인먼트 코리아’의 사장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 운암동 산중턱에 있던 소설가 황석영 선생 집에서 비밀리에 카세트레코더를 이용해 녹음되어 전국으로 배포되었고, 이후 노래 ‘임을 위한 행진곡’은 광주민중항쟁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역할을 한 노래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80년 5월 그리고 광주민중항쟁 1979년 박정희가 죽자 그해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 신군부는 탱크를 몰고 쿠테타를 일으켜 계엄을 선포합니다. 그러나 박정희의 유신독재 폭압을 뚫고 맞이한 1980년의 봄은 민주화를 염원하는 열기로 온 나라가 뜨거웠습니다. 1980년 봄, 물가고에 신음하던 노동자들은 전국 곳곳에서 임금인상 투쟁을 전개합니다. 기록에 의하면 1980년 1월부터 5월까지 노동청에는 511건의 조정신청이 접수되었고, 조정신청을 낸 사업장의 경우 평균 25∼50%에 이르는 임금인상을 요구하였습니다. 청계피복, 사북동원탄좌 등 많은 노동현장에서 근로조건 개선과 민주화 요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대학에선 긴급조치로 해직, 제적되었던 교수와 학생들이 복귀하면서 학원 민주화 열망도 드높았습니다.

연일 ‘계엄령 해제’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집회가 전국적으로 한창이던 1980년 5월17일, 신군부는 5월18일 0시를 기점으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 실시하겠다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계엄신군부는 옥내외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언론, 출판, 보도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실시하고 대학 휴교령, 파업과 태업 금지령을 내려 투쟁하는 학생과 노동자 민중들의 손발을 묶고 대대적인 검거를 자행합니다.



5월17일 밤 전북 금마에 있던 제7공수특전여단이 전남대와 조선대, 교육대 등에 배치되어 학생들을 연행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5월18일 오전 10시경 전남대 앞에서 등교하던 학생들에 대한 계엄군의 과격한 진압이 발생하는데 이 사건이 5.18의 시작입니다. 시위 초부터 자행된 계엄군의 무자비한 폭력진압은 시위대 주변의 군중들을 분노케 하여 5월18일 오후부터 시위는 학생시위를 넘어 광주시민의 항쟁으로 전화됐습니다.

5월19일 ‘화려한 휴가’로 명명된 ‘공수11여단’의 무자비한 폭력에 맞서 시민들이 결사항쟁에 나섰고, 열흘간의 항쟁과정에서 계엄군의 발포와 폭력에 의해 207명의 무고한 시민이 사망했으며 4000여 명의 부상자와 수천여 명의 구속자, 그리고 300여 명의 행불자가 나왔습니다.

광주민중항쟁은 무고한 시민을 제물로 권력을 찬탈하려한 신군부의 폭압적 핏빛 학살에 맞선 광주민중들의 의로운 투쟁으로 그 희생은 너무도 컸지만, 이후 광주민중항쟁은 우리 사회 민주화의 진원지로서, 살아 있는 시대정신으로, 역사의 전환점으로 자리했습니다.

임을 위한 행진곡 주인공 윤상원과 박기순.

윤상원은 1950년 전남 광산 출신으로 6남매 중 첫째로 전남대 정외과를 졸업했습니다. 1978년 1월 주택은행에 입행했으나 가족생계를 책임질 은행원 자리를 포기하고 서울 살이 반년만인 7월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돌아왔습니다. 광주로 돌아온 후 윤상원은 전남대 휴학생 박기순 등이 중심이 돼 만든 들불야학에 합류해 열심히 활동하였습니다. 계엄군이 광주를 장악한 5월18일, 윤상원은 광주 일대의 위기상황에서 몸을 숨기지 않고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실천투쟁을 전개합니다. 5월 항쟁 당시 모든 언론이 침묵하거나 왜곡 보도로 일관하던 때 광주에서 유일하게 민중언론 역할을 한 <투사회보>를 제작해 시민의 눈과 귀, 발이 되었으며, 산발적으로 흩어진 항쟁 대열의 선두에서 시민군을 조직적으로 만들었으며, 시민군의 대변인으로 할약했습니다.



5월27일 새벽 도청에 계엄군이 투입될 것이라는 정보를 접한 윤상원은 도청에 남아 있던 여성과 고등학생들을 불러 모아놓고 “너희들은 이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이제 너희들은 집으로 돌아가라. 우리들이 지금까지 한 항쟁을 잊지 말고 후세에도 이어가길 바란다. 오늘 우리는 패배할 것이다. 그러나 내일의 역사는 우리를 승리자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윤상원과 함께 마지막까지 도청에 남아 결사항전을 다짐한 150명의 시민군은 총을 들고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5월27일 새벽 3시, 탱크와 헬기로 무장한 계엄군이 기습적으로 도청 건물 뒤편을 장악해오자 계엄군에 대항하기 위해 복도로 나오던 윤상원은 계엄군의 총에 맞아 서른 한해의 삶을 마감합니다.



박기순은 전남대 사범대 역사교육과에 76학번으로, 1977년 6월27일 전남대교수 11명이 발표한 ‘우리의 교육지표’라는 성명서 발표를 이유로 참가 교수들이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자 연행교수 석방을 요구하며 6월29일부터 7월1일까지 3일간 전개한 ‘6.29교육지표 시위사건’으로 강제휴학을 당한 뒤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한 1세대 학생활동가로 광주지역에선 노동자의 누이로 불렸다 합니다. 노동현장을 나온 이후 들불야학에서 노동야학운동을 전개하다 1978년 성탄절 새벽 연탄가스 사고로 아깝게 목숨을 잃었습니다.

‘노동자의 누이’로 불리던 박기순은 윤상원과 함께 광주전남지역 최초의 ‘위장취업자’였고, 그들은 같은 뜻을 가지고 삶을 산 동지적 관계였기에 박기순의 죽음에 윤상원은 큰 상처를 입었다고 전합니다. 시대의 아픔을 온몸에 지고 간 두 사람의 죽음은 이후 친지들에 의해 영혼결혼식으로 맺어졌고, 지금은 망월동묘역에 합장 안치되어 계십니다.

사진 : 윤상원민주사회연구소, 5.18기념재단

최도은(민중가수) / 2009-11-05 오후 5:59:30
독자의견
저역시 / 2009-11-11 오전 10:42:25
친누나 같은 최도은 동지의 노래가 큰 위안이 됩니다.
박미경 / 2009-11-09 오후 4:05:49
블로깅하다 어느 분의 블로그에 이 노래가 있길래 들었는데 최도은님 목소리가 아니더군요. 검색해서 님이 부르는 이 노래를 듣고있었는데 노동뉴스에 오니 마침 글과 음악이 있네요. 정말 반갑습니다.^^ 남편이 구속된 시기에 삼성 앞에 투쟁하러 가면서 가장 많이 들었던 노래는 최도은님의 임을 위한 행진곡과 불나비 김광석의 일어나 등이었습니다. 노래를 들으며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었는데... 기사 제 블로그에 퍼갈게요. 최도은님, 항상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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