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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나비

펌글2010. 5. 13. 22:41
노동자 애창가요, 불나비
최도은의 노래이야기(3)

열정의 노래 불나비는 지난 30년 간 노동자 투쟁에 함께 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가 불린 진원지는 70년 전태일 열사의 정신을 이어받아 민주노조 건설 싸움을 치열하게 전개한 청계피복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이라 합니다. 누가 만든 노래인지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70년대 중반부터 불렀다(양승조 청계피복노조 전 지부장님의 구술)는 이야기와 1981년부터 부른 것으로 기억된다(현 전태일기념사업회 황만호 사무국장님)는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1970년 11월 13일 스물셋 청년 노동자 전태일은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일요일은 쉬게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마라!’를 외치며 온몸을 휘감는 불길 속에서도 이 땅 노동자의 현실을 외치며 산화해 갔습니다. 단 하루도 배불리 먹어보지 못하고, 단 한 시간도 인간다운 대접을 받아보지 못하고 살아왔던 전태일의 죽음에 긴장한 정부는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에게 수천만원(당시 100만원이면 서울에 집을 살 수 있었다 하고, 수천만원이면 종로 네거리에 나지막한 빌딩을 살 만큼의 거액의 돈)을 제시하며 전태일의 장례문제가 사회문제로 확산되지 않도록 갖은 회유를 다 했습니다.

장례투쟁 과정에서 ‘나는 돈 없이도 산다! 돈 좋아하는 놈들 다 가져가라!’ 영안실 바닥에 한 움큼의 돈을 뿌리며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는 절규하였습니다. 당황한 정부관리들은 돈을 주워 증거를 없애느라 우왕좌왕했지만, 수천만원의 돈으로 가족을 회유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후 열사의 빈소에서 당시 노동청장 이승택은 영세노동자들의 근로조건 개선을 위해 주일 유급휴가 실시, 임금인상, 8시간 노동제 실시(잔업수당 확보), 정기 건강진단 실시, 생리휴가 실시, 이중다락방 철폐, 노조결성 지원 등 8개 조항을 약속합니다. 전태일의 죽음으로 이 땅 노동자들의 삶이 세상에 알려졌고, 그로 인해 노동조건이 개선될 계기를 마련한 것입니다.

그러나 장례를 치른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12월에 접어들어 평화시장의 사장들은 건물 옥상에 설치한 현수막을 철거하는 등 다시 착취자의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이에 맞서 열사의 어머님과 청피노조 간부들은 ‘노조 사수’, ‘노동교실 사수’를 위한 집단분신 각오 투쟁 등을 전개하며 유신치하에서 험난한 투쟁을 전개합니다. ‘노동교실’은 1973년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힌 정인숙 부지부장이 대통령 부인 육영수씨에게 건의해 만들어진 노동자 학습 교육 공간으로, 노동조건 향상을 위한 노동자 사랑방으로 자리합니다.

그러나 노동교실은 개관식에서부터 험난한 탄압을 받아 중앙정보부 기간원들과 사장들은 ‘노동교실’을 ‘새마을 정신’을 교육시키는 ‘시장상가 새마을 근로자교실’로 만듭니다. 이에 청피노조는 노동교실을 이전하여 주체적으로 운영을 하였으나, 정권에 의해 번번이 폐쇄되어 유신 박정희 정권 내내 폭압의 한가운데에서 ‘노동교실 사수’ 투쟁을 전개하였습니다.

1980년 민주화의 봄을 맞아 청피노조는 11일간의 끈질긴 투쟁으로 29%의 임금인상을 얻어내며 잠시의 승리를 얻었지만 곧이어 등장한 전두환 정권에 의해 1981년 1월 해산됩니다. 노조 해산 이후 청피노동자들은 블랙리스트 명단에 올라 공식 취업이 불가능해지자 비합법적인 방식을 통해서 노조운동을 전개합니다. 재취업 운동을 통해 현장으로 들어간 노동자들은 1985년 ‘구로 연대투쟁’의 중심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1984년부터 전개한 청피노조 합법성 쟁취 투쟁은 ‘노동자 학생 연대투쟁의 전형’을 만들어 가면서 정권 자체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현실 속에서도 투쟁을 멈추지 않고 싸웠습니다.

청피노조는 1988년 5월 마침내 합법노조를 쟁취하게 됩니다. 청피노동자들의 불굴의 투쟁 의지는 노동자답게 싸우다 산화해간 전태일 열사의 정신에 있듯이 ‘평등 평화 자유’ 세상을 위해 맞서 싸우는 에너지로서 노래 ‘불나비’는 전태일 열사의 분신인 것입니다.

최도은(민중가수) / 2009-08-06 오전 11:3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