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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 기사입력 2007-08-23 13:36


[SW뉴스①] 지난 8월 2일 오전 5시. 영동고속도로 북수원 근처를 지나던 S산업 김호기(35) 대리는 아차 싶었다. 교통체증이 벌써 시작된 것이다. 조금 더 서둘렀어야 했나. 김 대리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이곳부터 막힌다면 마성터널∼용인, 이천∼문막까지 줄줄이 막힐 것이다.

불길한 예상은 적중했다. 늘어선 차량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늘은 구멍이 뚫린 것 마냥 비를 뿌렸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찾아간 여주 휴게소는 발디딜 틈도 없이 붐볐다.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 먹고 도망치듯 휴게소를 빠져나왔다.

강릉까지는 꼬박 8시간이 걸렸다. 오전에 일찌감치 도착해 오후에는 해수욕을 하리라던 계획이 무참히 깨졌다. 예약해 두었던 해수욕장 근처의 펜션에 들어가 짐을 풀고나자 벌써 어둑어둑해졌다. 비는 계속 내렸다.

김 대리는 횟집으로 차를 몰았다. 인터넷을 뒤져 찾아낸 맛집이다. 그러나 실내는 만원이었다. 비가 내린 탓에 피서객이 일찍부터 식당으로 몰린 탓이다. 이웃 식당도 사정은 마찬가지. 식당 종업원이 솔밭에 자리한 방갈로를 권했다.

음식값은 인터넷에서 검색한 것보다 거의 두배나 비쌌다. 왜 이렇게 비싸냐고 항의하자 종업원은 ‘휴가철이지 않느냐’고 오히려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어이가 없었지만 선택의 여지는 없었다. 김 대리는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1시간 동안 입술을 깨물었다. 이게 아닌데…. 그래도 내일 해수욕을 하면 마음이 풀어지겠지 하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음날 아침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장마가 지난지 한참인데 비는 계속 내렸다. 징징거리는 아이들을 데리고 해변으로 나가봤다. 산더미만한 파도가 몰려왔다. 물속으로 들어간 이는 눈을 씻고 봐도 없었다.

오후 들면서 하늘이 갰다. 그러자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피서객 수만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왔다. 해변에 비치 파라솔이 다시 쳐지고, 물놀이용품도 놓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휴가를 온 느낌이 났다. 날씨도 푹푹 쪘다.

파라솔 하나를 빌렸다. 반나절 사용료가 2만원이나 됐다. 기가 막혔다. 김 대리가 따지자 수금원은 ‘싫으면 그만두라’고 눈을 부라렸다. 피서철 해변은 조폭이 접수한다더니 소문이 사실이었다. 김 대리는 제대로 항의도 못하고 2만원을 주고 말았다.

해수욕을 마치고 찾아간 간이샤워장도 말문이 막히게 했다. 천막으로 엉성하게 막아놓은 외벽은 위태위태했다. 샤워기에서는 쥐오줌 만큼씩 물이 나왔다. 더 짜증스러운 것은 하수구가 막혔는지 시커먼 물이 질퍽거렸다. 아내는 기겁을 하고 샤워를 포기했다.

밤이 되자 열대야가 찾아왔다. 인터넷에는 그럴 듯하게 소개돼 있던 펜션이었는데 정작 에어컨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다. 밖에서는 밤늦도록 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했다. 몇몇은 술에 취해 고성방가를 일삼았다. 김 대리는 더는 참지 못하고 밖으로 나와 담배를 빼물었다. 이게 아닌데…. 벼르고 별렀던 휴가가 엉망이 된 것에 속이 상했다.

휴가의 마지막 날. 이른 새벽부터 비가 내렸다. 참 하늘도 안 도와준다. 김 대리는 오대산 소금강계곡에서 물놀이를 하고 귀경길에 오르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늦은 아침을 먹고 귀경길에 올랐다. 그러나 김 대리의 일그러진 휴가는 마지막까지 발목을 잡았다. 원주를 지나면서 다시 차들이 움직일 줄을 몰랐다. 귀경 행렬이 일요일에 몰릴까봐 일부러 토요일을 귀경일로 택한 것이었는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요령을 부렸던 모양이다. 자기 꾀에 자기가 넘어간 꼴이었다.

다시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지루한 운전이 이어졌다. 짜증을 내던 아이들은 포개져서 잠이 들었다. 아내는 ‘내년에는 돈이 들어도 해외로 휴가를 가야겠다’며 얼굴이 퉁퉁 부어 있다.

문득, 김 대리는 영업팀 최 대리를 떠올렸다. 다른 이들이 8월에 휴가를 가려고 눈치작전을 벌일 때 최 대리는 혼자서 9월로 휴가를 잡았다. “피서철엔 어디를 가도 대접 못 받지만 9월에 나서면 어디를 가도 귀한 손님”이라는 게 최 대리의 주장이었다. 김 대리는 최 대리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내년에는 꼭 9월에 휴가를 가겠다고 다짐했다.

스포츠월드 김산환 기자